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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펑(CZ), 맥도날드 알바에서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CEO가 된 남자

wanbonga 2025. 6. 12. 18:22

장펑
장펑

서론

작년에 친구가 코인 투자한다면서 바이낸스라는 거래소를 쓴다고 하더라. 그때는 그냥 "아, 외국 거래소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거래소 만든 사람이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장펑, 영어 이름으로는 창펑 자오(Changpeng Zhao), 줄여서 CZ라고 불리는 이 사람 말이다. 중국에서 태어나서 캐나다에서 자란 후 다시 아시아로 와서 암호화폐 제국을 건설한 케이스인데, 그 과정이 정말 드라마틱하다.

중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자 가정의 아들

장펑은 1977년 중국 장쑤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 교수였는데, 1980년대 말 천안문 사태 이후 정치적 상황이 불안해지자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장펑이 12살 때였다.

캐나다 밴쿠버에 정착한 가족들의 삶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는 중국에서는 교수였지만 캐나다에서는 언어 문제로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 그냥 전형적인 이민자 가정의 어려움이었던 거 같다.

장펑도 처음에는 영어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어려웠고,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은 언어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용돈을 벌기 위해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중에 CZ가 억만장자가 된 후에도 이 얘기를 자주 언급하는데, 아마 그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돈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를 배웠다고.

맥길 대학교와 컴퓨터 과학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장펑은 맥길 대학교에 진학했다. 전공은 컴퓨터 과학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인기 있는 전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펑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었고, 실제로 성적도 좋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유소에서 일하기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설거지도 했다. 그러면서도 학업은 꾸준히 이어갔는데, 이런 성실함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됐을 거다.

1999년 대학을 졸업한 후 장펑은 첫 직장을 구했다. 도쿄에 있는 일본 회사였는데, 거래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금융업계에 발을 담근 셈이었다.

금융업계에서의 경험들

일본에서 4년 정도 일한 후, 장펑은 뉴욕으로 이직했다. 블룸버그에서 선물 거래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이었는데, 여기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고 한다. 특히 금융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거래 시스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블룸버그에서 일하면서 장펑은 고빈도 거래(HFT)에 대해서도 배웠다. 밀리초 단위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세계였는데, 시스템의 속도와 안정성이 생명이었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바이낸스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됐을 거다.

그 후에는 다시 아시아로 돌아왔다. 상하이에 있는 퓨전 시스템즈라는 회사에서 CTO로 일했는데, 여기서도 거래 시스템 개발을 담당했다. 아시아 금융 시장에 대한 이해도 쌓을 수 있었고.

비트코인과의 첫 만남

2013년, 장펑의 인생을 바꾼 순간이 찾아왔다. 친구 하나가 비트코인에 대해 설명해줬는데,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가상의 돈이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정도로 생각했던 거 같다.

하지만 비트코인의 기술적 원리를 공부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정말 혁신적이라는 걸 깨달은 거다. 중앙 기관 없이도 신뢰할 수 있는 거래가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고.

그래서 장펑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암호화폐 업계에 뛰어든 거다. 주변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렸지만, 장펑은 확신이 있었다.

OKCoin에서의 경험

2014년, 장펑은 중국의 OKCoin이라는 암호화폐 거래소에 CTO로 합류했다. 당시 OKCoin은 중국에서 가장 큰 비트코인 거래소 중 하나였는데, 장펑은 여기서 암호화폐 거래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배웠다.

하지만 OKCoin에서 일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을 발견했다. 시스템이 불안정하고, 고객 서비스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국제적으로 확장하려는 의지가 부족해 보였다. 장펑은 "더 나은 거래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OKCoin에서 1년 정도 일한 후, 장펑은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계획을 세웠다. 자신만의 암호화폐 거래소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다.

바이낸스의 탄생

2017년 7월, 드디어 바이낸스가 세상에 나왔다. 회사 이름은 "Binary"와 "Finance"를 합친 거였는데, 장펑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의 금융 서비스라는 의미였던 거 같다.

초기 자본 조달을 위해 ICO(Initial Coin Offering)를 했다. BNB라는 자체 토큰을 발행해서 1,500만 달러를 모았는데, 당시로서는 꽤 큰 규모였다. 하지만 장펑의 목표는 훨씬 컸다.

바이낸스의 차별화 포인트는 명확했다. 첫째, 빠른 거래 속도. 초당 140만 건의 거래를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둘째, 낮은 수수료. 기존 거래소보다 훨씬 저렴한 수수료를 책정했다. 셋째, 다양한 암호화폐 지원. 비트코인뿐만 아니라 수백 종의 알트코인도 거래할 수 있게 했다.

폭발적인 성장

바이낸스의 성장 속도는 정말 놀라웠다. 출시 6개월 만에 거래량 기준 세계 1위 거래소가 됐다. 이런 속도로 성장한 핀테크 기업은 거의 없었을 거다.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였다. 우선 타이밍이 좋았다. 2017년은 암호화폐 대장정이 시작된 해였거든. 비트코인 가격이 2만 달러까지 올라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암호화폐 붐이 일어났다.

하지만 타이밍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장펑과 그의 팀이 정말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직관적이었고, 시스템도 안정적이었다. 고객 지원도 24시간 다국어로 제공했다.

마케팅도 스마트했다. 각 나라의 암호화폐 커뮤니티와 적극적으로 소통했고, 인플루언서들과도 협력했다. 바이낸스가 단순히 거래소가 아니라 암호화폐 생태계의 허브가 되도록 노력했다.

규제와의 줄타기

하지만 성장과 함께 시련도 찾아왔다. 각국 정부들이 암호화폐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한 거다. 특히 중국은 2017년 말부터 암호화폐 거래를 전면 금지했다.

장펑은 빠르게 대응했다. 본사를 중국에서 일본으로 옮겼다가, 다시 몰타로 이전했다. "규제가 명확한 곳에서 합법적으로 사업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전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각 나라마다 규제가 다르고, 라이선스를 받는 것도 복잡했다. 그래서 바이낸스는 "글로벌 거래소"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여러 나라에 자회사를 두는 형태로 운영하게 됐다.

미국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미국 규제 당국은 바이낸스가 적절한 라이선스 없이 미국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바이낸스US라는 별도 법인을 만들어야 했다.

사업 영역 확장

장펑은 단순한 거래소에 만족하지 않았다. 암호화폐 관련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했다.

바이낸스 스마트 체인(BSC)을 출시해서 탈중앙화 금융(DeFi) 시장에도 진출했다. 이더리움보다 빠르고 저렴한 블록체인을 만들어서 개발자들을 유치하려고 했다.

NFT 마켓플레이스도 만들었다. 2021년 NFT 붐이 일어났을 때 빠르게 대응한 거다. 유명 아티스트들과 협력해서 독점 NFT도 출시했다.

암호화폐 대출, 스테이킹, 선물 거래 등 다양한 금융 상품도 출시했다. 이제 바이낸스는 단순한 거래소가 아니라 암호화폐 생태계의 모든 걸 다 하는 회사가 됐다.

개인적인 철학과 라이프스타일

장펑은 정말 독특한 사람이다. 억만장자가 됐지만 라이프스타일은 여전히 검소하다. 비싼 차나 요트 같은 건 관심이 없고,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쏟는다.

특히 인상적인 건 그의 글로벌 마인드다. 본인이 중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랐기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정말 중요하게 여긴다. 바이낸스 직원들도 전 세계에서 모집하고, 회사 문화도 정말 다국적이다.

암호화폐에 대한 철학도 명확하다. "금융의 자유"라는 게 그의 모토인데,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들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금융 서비스를 쓸 수 있게 하겠다는 거다.

자선 활동과 사회 공헌

장펑은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바이낸스 채리티라는 재단을 만들어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투명한 기부를 추진하고 있다.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든 과정을 블록체인에 기록해서 투명성을 보장하는 거다.

특히 교육 분야에 관심이 많다.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

환경 문제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비트코인 채굴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친환경 채굴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최근 상황과 도전

하지만 최근 바이낸스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각국 규제 당국의 압박이 계속되고 있고, 경쟁사들도 많이 생겼다. 암호화폐 시장 자체도 2022년부터 침체기에 들어갔다.

특히 FTX 파산 사태는 업계 전체에 큰 충격을 줬다. 바이낸스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는데, 고객들이 거래소의 안전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 거다.

장펑은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자산 증명(Proof of Reserves) 시스템을 도입했고, 각국 규제에 맞춰 컴플라이언스를 강화하고 있다.

2023년에는 미국 법무부와 합의하면서 43억 달러의 벌금을 내기로 했다. 그리고 장펑 본인도 CEO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큰 타격이었겠지만, 회사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바이낸스의 미래

장펑이 CEO에서 물러났지만, 바이낸스는 여전히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다. 새로운 CEO 리처드 텡이 운영을 맡게 됐는데, 규제 준수와 안정적 성장에 집중할 것 같다.

장펑 본인은 교육 분야에 더 집중하겠다고 했다. 기글(Giggle) 아카데미라는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만들어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려고 한다.

바이낸스도 AI와 웹3 기술에 더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단순한 거래소를 넘어서 차세대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다.

장펑에게서 배우는 교훈

장펑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끊임없는 도전 정신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암호화폐 업계에 뛰어든 용기,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놀랍다.

또한 글로벌 마인드셋도 배울 점이다. 한 나라에 안주하지 않고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벌인 것,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성공 요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고객 중심 사고도 중요하다. 기존 거래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고객이 진짜 원하는 서비스를 만들어낸 것이 바이낸스 성공의 핵심이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책임감도 인상적이다. 단순히 돈만 버는 게 아니라, 기술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마무리

장펑(CZ)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느낀 건, 정말 시대를 잘 읽은 사람이라는 거다. 암호화폐가 막 태동하던 시기에 그 가능성을 일찍 깨닫고, 과감하게 도전했다. 그리고 실제로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어냈다.

물론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규제 문제로 여러 번 위기를 맞았고, 최근에는 개인적으로도 큰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장펑 같은 글로벌 기업가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한국 시장에만 안주하지 말고, 처음부터 세계를 무대로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암호화폐 업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그리고 장펑이 새로운 분야에서 또 어떤 혁신을 보여줄지 정말 궁금하다. 맥도날드에서 알바하던 소년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정말 꿈은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